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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복지가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

 

사단법인 해냄복지회 이사장

김재익 박사

 

네덜란드의 장애인 복지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화려한 복지제도의 목록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의 복지정책들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우리가 보아야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은 하나의 분명한 철학이다. 네덜란드는 장애인을 단순히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필요한 돌봄을 선택하며, 노동과 지역사회 안에서 시민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를 통해 제도를 짜 왔다. 이것이 네덜란드 장애인 복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 복지체계가 완전한 이상향이라 할 수는 없다. 제도는 다소 복잡하고, 행정은 분절되어 있으며, 지방정부 간 지원 격차도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무시할 수 없게 크다. 그들은 장애인의 삶을 시설과 보호 중심으로 묶어두지 않고,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게 할 것인가를 사고와 제도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장애인 복지의 핵심은 개인예산제, PGB에 있다. PGB는 장애인이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국가나 지방정부가 정한 서비스 제공기관에 수동적으로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선택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예산을 부여하는 제도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장애인에게 필요한 돌봄을 국가가 대신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필요한 돌봄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도록 공적 예산을 준다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제도는 단순한 현금지원이 아니다. 그것은 권리이면서 동시에 책임이다. 장애인은 예산을 통해 활동지원, 가사도움, 주간활동, 간호, 상담, 단기보호 등 자신의 삶에 필요한 서비스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가족이나 이웃, 전문 돌봄인을 직접 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계약, 급여 지급, 서비스 관리, 행정 보고의 책임도 함께 따른다. 네덜란드 개인예산제는 자유를 주되, 그 자유가 방임이 되지 않도록 관리체계도 함께 세워놓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회보험은행인 SVB의 역할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일정 영역의 PGB 예산이 당사자의 개인 통장에 직접 입금되지 않고, 대신 SVB가 예산을 관리하고, 예산보유자의 지시에 따라 돌봄 제공자에게 직접 비용을 지급한다. 이것을 인출권방식이라고 부른다. 이는 장애인의 선택권을 보장하면서도 부정수급과 예산 오남용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한국도 개인예산제를 도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현금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을 넘어, 한국도 어떻게 하면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면서도 공공재정의 책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돌봄체계는 네 개의 큰 법률로 나누어진다. Wlz는 장기요양법으로, 중증장애나 치매 등으로 24시간 돌봄이나 감독이 필요한 사람을 지원한다. Wmo는 사회지원법으로, 지방정부가 장애인과 노인이 집에서 살아가고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생활지원, 이동지원, 주거개조, 보조기기 등을 제공한다. Zvw는 건강보험법으로, 방문간호나 의료적 간호처럼 건강보험 영역의 돌봄을 담당한다. Jeugdwet은 아동·청소년법으로, 18세 미만 장애아동과 청소년, 그리고 그 가족의 돌봄과 보호를 맡는다. 이 네 법은 네덜란드 복지의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다.돌봄의 성격에 따라 책임 주체를 나누고, 의료와 생활지원, 장기요양과 아동지원을 구분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조는 큰 약점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인데, 제도는 네 갈래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이면서 의료적 간호가 필요하고, 지역사회 생활지원도 필요하며, 가족지원까지 필요한 경우에는 여러 제도의 문을 동시에 두드려야 한다. 신청창구도 다르고, 판정기준도 다르며, 지방정부마다 단가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네덜란드 내부에서도 하나의 통합 개인예산하나의 창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이 점은 한국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아직 개인예산제를 본격적으로 완성하지 않고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처럼 나중에 분절 문제를 고치는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통합적 사정, 통합지원계획, 통합창구를 설계해야 한다. 장애인의 삶은 활동지원, 의료, 주거, 고용, 가족지원, 지역사회 참여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의 개인예산제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보는 구조로 설계되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서울형 개인예산제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할 것이다.

 

소득보장에서도 네덜란드는 노동능력과 소득상실을 중심으로 제도를 구성하고 있다.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능력을 잃은 사람은 WIA라는 제도를 통해 지원을 받는다. 완전히 일할 수 없고 회복 가능성이 낮은 사람에게는 비교적 안정적인 소득보장이 제공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급여와 재취업 지원이 함께 제공된다. 청년기부터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Wajong이라는 별도 제도가 작동한다. 이 제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 보호에서 노동능력 평가와 참여 중심으로 바뀌어 간다. 여기서 우리는 네덜란드 복지국가의 두 얼굴을 보게 된다. 하나는 소득을 보장하는 복지국가의 얼굴이다. 다른 하나는 가능한 사람에게 노동시장 참여를 요구하는 참여국가의 얼굴이다. 네덜란드는 장애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노동 밖의 존재로 분류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능력을 평가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고용지원을 연결한다. 이 방향은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지나치게 노동능력 중심으로 흐를 경우 중증장애인과 복합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압박할 위험도 사실 있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소득보장과 고용참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되, 일할 수 없는 사람의 존엄을 가난으로 내몰아서도 결코 안 된다. 고용정책에서도 네덜란드는 보호고용 중심에서 일반노동시장 참여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다. 참여법은 지방정부가 노동능력이 있는 장애인의 취업을 지원하도록 만든 제도다. 과거의 보호작업장 중심 체계는 점차 축소되고, 일반기업 안에서 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임금보조, 직무지도, 고용주 위험보장, 노동비용 보전 등이 장애인의 노동 시 함께 제공된다. 또한 일자리 협약을 통해 민간과 공공부문이 장애인을 위한 추가 일자리를 만들도록 목표를 세워 나간다. 이 방식은 한국의 장애인 고용정책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장애인 의무고용률과 고용부담금을 중심으로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법적 의무만으로는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장애인을 채용했을 때 실제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직무는 어떻게 조정되는지, 중증장애인이 일터에서 계속 버틸 수 있도록 누가 지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네덜란드는 처벌만이 아니라 유인과 지원을 결합하려 한다. 한국도 부담금 징수 중심을 넘어, 직무개발, 직무지도, 근로지원, 임금보조, 고용주 지원을 하나의 고용생태계로 묶어야 한다. 또한 고령장애인 정책과 통합돌봄도 중요한 한 축이다.

네덜란드는 고령자와 장애인이 가능한 오래 자기 집과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지역사회 계속 거주의 방향을 강조한다. 장기요양이 필요한 사람은 Wlz를 통해 시설이나 재가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일상생활 지원은 Wmo가 맡으며, 방문간호는 Zvw를 통해 제공된다. 치매정책과 노인돌봄정책도 지역사회 안에서 존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특히 Buurtzorg라는 방문간호 모델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모델의 핵심은 거대한 관료조직이 아니라, 10명 안팎의 간호사 자율팀이 한 지역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방식이다. 중간관리층을 줄이고, 현장의 전문인력이 이용자의 삶을 중심으로 스스로 판단하며 움직인다. 이것은 단순히 간호서비스의 혁신이 아니라, 복지행정이 인간을 서류로 보지 않고, 삶의 현장 속에서 만나는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 모델을 무조건 찬양해서도 결코 안 된다. 참여사회라는 이름 아래 국가 책임이 개인과 가족에게 사실 과도하게 전가될 위험도 있다. 개인예산제는 자기결정권을 강화하지만, 행정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지방정부 중심의 제도는 지역 특성에 맞춘 지원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지역 간 불평등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노동참여 정책은 장애인의 사회적 시민권을 강화하지만, 일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사실상 압박이 될 수 있다. 복지국가의 개혁은 언제나 해방과 긴축, 권리와 책임, 선택과 부담 사이의 긴장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가 한국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분명히 있다. 장애인 복지는 더 이상 서비스를 얼마나 제공하는가의 문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장애인이 자기 삶을 얼마나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활동지원 시간이 몇 시간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을 누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소득보장 금액도 중요하지만, 그 소득이 지역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인지가 더 중요하다. 고용률도 중요하지만, 그 일자리가 존엄한 노동인지, 지속 가능한 일자리인지가 더 중요하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는 현재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수요자 중심 지원체계를 말해 왔고, 탈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말해 왔으며, 개인예산제 도입도 시범사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의 이름만 바뀌어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 개인예산제가 또 하나의 복잡한 행정사업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장애인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 시장과 지역사회 자원이 풍부하게 있어야 한다. 통합돌봄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보건·복지·주거·고용이 한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탈시설이 선언에 머물지 않으려면,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갈 집, 사람, 소득, 돌봄, 관계가 반드시 함께 마련되어야만 한다. 네덜란드 장애인 복지의 깊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복지는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삶을 지탱하는 공적 구조다. 장애인은 돌봄의 대상이기 전에 권리의 주체이며, 복지서비스의 이용자이기 전에 자기 삶의 설계자다. 국가는 그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예산과 제도와 지역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한국이 네덜란드에서 배워야 할 것은 제도의 껍데기가 아니다.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장애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라 할 것이다. 장애인을 시설과 보호 안에 가두는 복지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노동과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복지며, 행정이 정한 길을 따르게 하는 복지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복지다. 그리고 그 선택이 외로운 책임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공공시스템이 끝까지 받쳐주는 복지다. 그리고 장애인의 자기결정은 돈의 흐름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자기결정은 주거, 돌봄, 소득, 고용, 이동, 관계가 함께 열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네덜란드 장애인 복지는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다. 이제 한국 장애인 복지가 답해야 할 차례다. 우리는 장애인에게 서비스를 배분하는 나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장애인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복지국가의 품격이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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