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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철학으로 다시 읽는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

- 존재의 조건, 사회의 책임 -

Good Job 자립생활센터 소장

김재익 철학 석사

 

장애를 가진다는 것은 단지 몸 어딘가의 기능이 다르다는 뜻만이 아니다. 인간은 세상 밖에서 삶을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상 한가운데 들어와 관계와 제도, 공간과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존재란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장애 역시 개인의 몸 안에만 갇힌 문제로 바라볼 수 없다. 휠체어를 쓰는 사람이 계단 앞에서 멈추고, 말이 느린 사람이 빠른 회의 속에서 발언권을 잃고,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이 선택의 자리에서 밀려날 때, 그 장면은 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충돌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구조를 좀처럼 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익명의 상식이 모든 것을 대신 설명하려 든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위험하니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이데거가 세인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익명의 목소리다. 세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입을 빌려 되풀이되는 평범한 상식이며, 한 사람의 삶을 조용히 축소시키는 사회적 습관이다. 장애인의 삶은 오랫동안 이 세인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다. 보호받아야 한다는 말은 넘쳤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드물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은 단순한 복지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서비스의 양을 조금 더 늘리자는 요청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내 삶을 결정하는가, 나는 사회가 대신 정해 놓은 자리에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떠맡을 것인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이 필요하다. 자립생활은 혼자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결단이다. 그렇기에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의 권리운동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존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철학적 실천운동이기도 하다.

 

하이데거 철학의 힘은 장애를 동정이나 교정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만드는 데 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장애를 결핍으로 이해해 왔다. 그래서 장애인의 삶은 늘 보호와 관리의 언어로 설명되었다. 가족이 대신 판단하고, 시설이 대신 조직해 주고, 전문가가 대신 결정하는 구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순한 객체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문제삼을 수 있는 존재, 곧 현존재다. 이 말은 장애인 역시 결코 타인의 판단에만 맡겨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장애인은 누군가가 대신 살아 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인수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존재라는 말은 장애인의 현실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 준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속에서 산다. 집의 구조, 학교의 분위기, 직장의 규칙, 대중교통의 설계, 행정의 언어, 타인의 속도와 태도가 모두 삶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장애는 몸 안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몸과 세계가 만나는 접점마다 형성된다. 접근할 수 없는 건물, 이해하기 어려운 안내문, 기다려 주지 않는 제도, 위험을 이유로 모든 선택을 미리 차단하는 문화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가 만든 벽이다. 이 점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장애를 끝내 개인의 부족함으로만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시선은 묻는다. 정말 문제는 몸에만 있는가. 아니면 그 몸이 살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은 세계에도 있는가.

 

이 물음은 자립생활운동의 철학적 토대를 이룬다. 자립생활은 장애인이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나 관계와 의존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핵심은 의존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있다. 타인의 선의와 통제에 묶인 의존은 주체성을 약화시키지만, 권리와 제도에 기반한 지원은 주체성을 지탱해 준다.

 

활동지원, 보조공학, 접근 가능한 환경, 정보 접근, 교육과 노동의 기회는 시혜가 아니라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자립생활이란 도움의 부정이 아니라, 도움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삶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세인은 늘 말한다. 원래 장애인은 위험하니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한다. 전문가가 더 잘 안다. 가족이 대신 결정하는 편이 안전하다. 시설이 더 효율적이다. 겉으로는 다 옳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들은 한 사람의 삶을 점점 좁은 자리로 밀어 넣는다. 선택보다 순응을, 가능성보다 안정을, 결단보다 대리를 앞세운다. 그 결과 장애인은 자기 삶의 설계자가 아니라, 타인이 마련한 틀 안에서만 허용되는 존재가 된다. 하이데거가 비본래성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상태다. 남들이 대신 정해 놓은 삶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떠맡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장애인의 삶은 오랫동안 이러한 비본래성 속에 갇혀 있었다. 문제는 그 비본래성이 제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사자의 내면에도 스며든다. 오랫동안 제한된 선택, 반복된 통제, 낮은 기대 속에서 살아가면 사람은 어느 순간 사회가 부여한 한계를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까지만 가능하다, 나는 혼자서는 안 된다, 결정은 누군가 더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화된다. 이때 억압은 외부의 힘만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방식이 된다. 그래서 자립생활운동은 단순히 외부의 차별과 제도적 장벽에 맞서는 운동이 아니라, 내면화된 비본래성에 맞서는 운동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에 자립생활운동은 본래성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하이데거에게 본래성이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조건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그 조건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는 태도다. 장애인의 삶에서 본래성은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삶, 지원을 받더라도 수동적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서는 삶,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감수하면서도 자기 길을 선택하는 삶이 그것이다. 자립생활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무결한 독립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은 나의 것이다라는 가장 근본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은 단지 개인의 마음가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기결정에는 반드시 사회적 조건이 뒤따라야 한다. 이동할 수 없으면 선택은 줄어든다. 교육받지 못하면 가능성은 좁아진다. 소득보장이 약하면 자립생활은 곧 빈곤의 위험이 된다. 활동지원이 불안정하면 일상은 늘 타인의 시간표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자립생활운동은 개인의 결단과 사회의 책임을 함께 묻는다.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야 하지만,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 역시 바뀌어야 한다. 세계를 바꾸지 않은 채 자기책임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자립생활이 아니라 또 다른 방임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제나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함께-있음이라고 불렀다. 이 개념은 자립생활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자립생활은 고립의 미화가 아니다. 혼자 살아가는 기술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되, 그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의 주체로 서는 방식이다. 인간은 본래 상호의존적 존재다. 아이는 보호자에게 의존하고, 노인은 돌봄에 의존하며, 모든 시민은 제도와 공공서비스, 타인의 노동에 의존한다. 장애인의 의존만 특별히 문제시되어 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립생활의 핵심은 의존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의존을 존엄과 선택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다시 짜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다. 인간을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는 장애인의 삶을 좁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을 자기 존재를 스스로 떠맡는 주체로 보는 사회는, 서로 다른 몸과 속도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려 한다. 그러므로 활동지원, 접근 가능한 교통, 편의시설, 정보 접근, 교육권, 노동권은 단지 복지 목록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존재 조건이다. 자립생활운동은 바로 이 조건들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존엄을 사회 구조 속에 새로 새기려는 실천하려는 운동이다.

 

결국 하이데거 철학으로 다시 읽는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은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나아가려는 인간 존재의 깊은 투쟁이다. 그것은 사회가 대신 정한 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그 조건에만 갇히지 않으려는 결단이다. 그것은 보호의 언어를 권리의 언어로, 대리의 구조를 자기결정의 구조로, 동정의 시선을 존재의 존엄으로 바꾸려는 실천이다. 그래서 자립생활운동은 단순한 정책 개선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장애인이 자기 삶의 주체임을 선언하는 일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에 묻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삶의 방향은 누가 정해야 하는가. 존엄은 과연 정상성의 척도에 따라 배분될 수 있는가.

 

오늘도 많은 장애인이 여전히 이동할 수 없어 포기하고, 말할 수 없어 침묵하며, 결정할 수 없어 타인의 판단을 따른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자립생활운동은 다시 시작된다. 그것은 보호받는 삶을 넘어 스스로 선택하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실존적 응답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며,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물음 앞에서 하이데거 철학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은 누군가가 대신 살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떠맡아야 할 존재다. 자립생활운동은 바로 그 철학을 현실의 언어로 번역한 가장 깊은 사회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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